열린협상연구소 '생활 속 협상'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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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발견하는 승부의 비밀] #8. 궁지로 몰렸을 땐 결정권을 넘겨라.

관리자
2017-12-05
조회수 2557

한 아파트에서 택배 차량 진입을 막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지상 주차장이 없는 아파트였다. 그런 이유로 아파트 측은 택배 차량 출입을 통제하면서 택배업체 측에 '걸어서 배송하라'고 통보했다. 입주민들의 쾌적한 주거환경에 방해가 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택배업체로서는 받아드리기 힘든 요구였다. 그렇다고 약자 입장인 택배업체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별로 없어 보였다. 택배업체는 "택배 기사는 노예가 아니다. 정당하게 아파트 단지로 차량을 진입시켜 배송할 권리가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만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다. 입장 차이만 계속될 뿐이다. 게다가 택배업체로서는 전면에 나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파트 주민들도 그들의 고객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택배업체는 어떻게 갈등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택배 업체는 해당 아파트로 주문된 택배를 반송조치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구를 넣어 반송사유 스티커로 붙였다.


"해당 배송지 아파트는 택배 차량 진입 금지로 모든 택배사가 배송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걸어서 배송하라는 아파트 측 입장에 저희도 해결방법이 없어 반송 조치합니다."


내용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여론은 택배기사의 손을 들었다. 문구는 아파트 측의 택배 차량 출입 통제를 철회하도록 압박하는 역할을 했다. 갈등의 원인이 '우리'가 아니라 '상대방'에게 있으며, 그 해결책 또한 상대방에게 있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을 호소하는 문구다. 물론 이것으로 갈등을 완벽하게 해결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적어도 불합리한 상황을 세상에 알리고픈 택배업체 측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하지 않았을까.


일러스트 / 드로잉프렌즈 장진천


협상에서, 특히 약자의 입장이라면 상대방의 요구를 무턱대고 거부하기는 어렵다. 더는 협상하지 않겠다는 통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이때 임기응변식 변명이 아니라 누가 봐도 타당하다고 생각될 이유를 만들어 거절해야 한다. 거절의 이유가 '우리 탓'이 아니라 '당신 탓' 대문이라면 더없이 좋은 명분이 된다.


앞의 사례에서 문구와 같은 이유를 내세우지 않고 택배를 반송 조치했다면 그 책임은 택배업체 측으로 넘어갔을 공산이 크다. 택배업체도 그 점을 미리 예상하지 않았을까. 그들은 정당하게 차량을 출입해서 물품을 배송할 권리가 자신들에게 있는데, 차량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에 부득이 반송 조치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여론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이유였다.


한때 깐깐하기로 소문난 상사와 일을 한 적이 있다. 거래처에서 받은 견적을 쉽사리 통과시켜주는 법이 없었다. 담당자가 충분한 네고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추가 가격 인하를 지시하는 식이였다.


한 번은 법무사 비용을 승인받아야 할 일이 있었다. 계열사 네다섯 곳의 등기 등 꽤 많은 일을 한 달에 걸쳐 진행한 후였다. 꼼꼼한 일 처리로 신뢰가 두터운 거래처였다. 다른  업체보다 저렴한 비용이라는 걸 잘 알기에 수수료를 깎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사는 역시나 무리하게 청구 금액을 깎으려 했다. 문제는 해당 내용을 잘 들여다보지도 않고 금액만 깎으려는 데 있었다. 아무리 네고를 거쳐 합리적인 금액을 청구해도 결과는 같았다.


"거래처에서 저희가 제시하는 대로 가격을 맞춰주겠답니다. 어느 정도 금액이면 괜찮겠습니까? 얼마를 청구하라고 얘기할까요?"


고민 끝에 상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상사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부르는 가격에 무조건 깎고 보자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근거 없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사람이라면 오명을 쓰고 있지 않기 때문에 지나친 할인을 요구하기도 어렵다.


예상한 반응이었다. 이후 상사는 비용 산정에 대한 기준을 내게 물어왔고, 그 동안 들인 시간과 결과물을 보여주며 설명했다. 결국 이 정도 금액이면 합리적인 비용이라고 말하며 상사를 설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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